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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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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215년부터 기원전 205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카르타고와 로마의 갈등을 틈타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필리포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일리리아 지역을 침공했으나, 로마의 반격에 직면하여 해상에서의 작전은 실패했다. 로마는 그리스 동맹국들과 협력하여 마케도니아를 견제했고, 결국 아이톨리아 동맹의 이탈과 평화 협상을 통해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했다. 이 전쟁은 로마가 동부 지중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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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기원전 218년의 지중해
기원전 218년의 지중해
기본 정보
교전 기간기원전 214년 - 기원전 205년
장소마케도니아와 일리리아
결과포이니케 평화 조약 체결
원인데메트리오스의 선동;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인한 로마의 혼란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국
교전국 2아에톨리아 동맹
교전국 3일리리아인
교전국 4다르다니아
교전국 5페르가몬
교전국 6스파르타
교전국 7엘리스
교전국 8메세니아
교전국 9마케도니아
교전국 10아카이아 동맹
교전국 11카르타고 함대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및 동맹군 지휘관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로마 및 동맹군 지휘관 2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로마 및 동맹군 지휘관 3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아에톨리아 동맹 지휘관스코파스
일리리아 왕스케르딜라이다스
페르가몬 왕아탈로스 1세
스파르타 지도자마카니다스
마케도니아 및 동맹군 지휘관필리포스 5세
아카이아 동맹 지휘관필로포이멘
기타 지휘관데메트리우스 2세 에톨리쿠스
병력 규모
로마군5,000 - 8,000명
로마 해군5단 노선 25척
페르가몬 해군5단 노선 30-40척
마케도니아군약 6,000명
마케도니아 해군소형 갤리 (렘부스) 120척

2. 배경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로마의 힘이 약해지자,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는 서쪽으로 자신의 힘을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포스가 이 기회를 잡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였다.[61]

데메트리우스는 기원전 229년에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이 끝난 후 일리리아 해안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61] 그러나 기원전 219년, 제2차 일리리아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필리포스에게 망명했다.[62]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에 휘말린 필리포스는 기원전 217년 6월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리포스는 이 편지를 데메트리우스에게 보였고, 데메트리우스는 왕국을 회복할 기회라고 판단하여 필리포스 5세에게 아이톨리아 동맹과 평화 조약을 맺고 일리리아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릴 것을 조언했다. 폴리비우스는 데메트리우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63]

... Ἑλλάδα μὲν ἤδη πᾶσαν ὑπήκοον ὑμῖν ἔσεσθαι ... εἰς δὲ τὴν Ἰταλίαν διαβάντες ἄρξεσθε τῆς καθόλου συστάσεως τῆς τῶν πραγμάτων. καὶ νῦν ἐστι καιρός, ἐπειδὴ Ῥωμαῖοι συμπεπτώκασι.|... 그리스는 이미 당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로의 당신의 진출은 세계 제국을 획득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 그리고 지금이 로마인들이 패배를 겪은 때가 행동할 때입니다.grc

필리포스는 데메트리우스에게 쉽게 설득되었다.[64]

테오도어 몸젠은 자신의 저서 『로마사 III.6』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대원정 이후, 그리스 세계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중에서도 마케도니아 왕국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며, 기원전 220년에 즉위한 필리포스 5세의 치세를 필리포스 2세 시대처럼 안정적이라고 평가했다.

2. 1. 로마와 카르타고의 갈등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에서 로마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이탈리아반도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로마의 힘이 그쪽으로 쏠리자,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는 그의 힘을 서부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포스가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중요한 요인은 파로스의 통치자 데메트리우스의 영향이었다.[61]

데메트리우스는 기원전 229년에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이 끝난 후 일리리아 해안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61] 그러나 기원전 219년, 제2차 일리리아 전쟁 동안에 그는 로마에 의해 패배를 당하자, 필리포스에게로 달아났다.[62]

아이톨리아와 전쟁에 엮이게 된 필리포스는 기원전 217년 6월에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리포스는 처음에 데메트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마 왕국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에, 데메트리우스는 즉시 젊은 왕에게 아이톨리아와 화해를 하라고 조언을 해주었고, 그의 관심을 일리리아이탈리아로 돌렸다. 폴리비우스는 데메트리우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 ''그리스는 이미 당신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애정을 가진 아카이아인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재난이 가져온 두려움을 가진 아이톨라이인 모두 말입니다. 당신의 개입으로 이탈리아는 보편적인 제국을 획득하는 첫 단계입니다. 그것에 대해 아무도 당신보다 더 나은 주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역경을 겪고 있는 지금이 행동할 순간인 것입니다.''[63]

필리포스는 쉽게 설득당했다.[64]

기원전 200년의 그리스의 제 동맹과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도

2. 2.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필리포스 5세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의 통치 아래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테오도어 몸젠은 필리포스 5세의 치세를 필리포스 2세 시대처럼 안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대원정 이후, 그리스 세계는 안정을 되찾았고, 그중에서도 마케도니아 왕국은 큰 존재감을 보였다. 비록 켈트족 침입으로부터의 회복은 더뎠지만, 북쪽 국경은 안정되었고, 일리리아를 위압하며 남쪽 그리스 대부분을 세력 아래 두면서 활력을 유지했다.[61]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로마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필리포스 5세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엿보았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포스 5세가 이 기회를 잡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였다.[1]

제1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9–228년) 이후 로마는 데메트리우스를 일리리아 해안 대부분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10년 동안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일리리아의 동맹국을 공격하고 무역선을 약탈했다. 제2차 일리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그는 필리포스 왕에게 망명했다.[2]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전쟁(동맹시 전쟁, 기원전 220-217년)에 휘말린 필리포스는 기원전 217년 6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리포스는 처음에 이 편지를 데메트리우스에게만 보여주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왕국을 되찾을 기회라고 판단하여, 필리포스 5세에게 아이톨리아 동맹과 평화 조약을 맺고 일리리아와 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릴 것을 조언했다. 폴리비우스는 데메트리우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스는 이미 당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카이아인들은 진정한 애정에서, 아이톨리아인들은 현재 전쟁에서의 재앙으로 인해 받은 공포에서 복종합니다.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로의 당신의 진출은 세계 제국을 획득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당신보다 더 나은 자격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로마인들이 패배를 겪은 때가 행동할 때입니다."[3]

필리포스는 데메트리우스에게 설득되어[4] 즉시 아이톨리아인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나우팍투스 근처 해안에서 열린 회의에서 필리포스는 아이톨리아 지도자들을 만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

2. 3. 일리리아 문제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로마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포스가 이 기회를 잡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였다.[61]

제1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28년) 이후, 로마는 데메트리우스를 일리리아 해안 대부분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1] 그러나, 제2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19년)에서 데메트리우스는 로마에 패배하여 필리포스 5세에게 의탁했다.[62]

아이톨리아와의 전쟁에 휘말린 필리포스는 기원전 217년 6월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리포스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데메트리우스에게만 보여주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왕국을 되찾을 기회라고 판단하여, 필리포스 5세에게 아이톨리아 동맹과 평화 조약을 맺고 일리리아와 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릴 것을 조언했다. 폴리비우스는 데메트리우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63]

... Ἑλλάδα μὲν ἤδη πᾶσαν ὑπήκοον ὑμῖν ἔσεσθαι ... εἰς δὲ τὴν Ἰταλίαν διαβάντες ἄρξεσθε τῆς καθόλου συστάσεως τῆς τῶν πραγμάτων. καὶ νῦν ἐστι καιρός, ἐπειδὴ Ῥωμαῖοι συμπεπτώκασι.|... 그리스는 이미 당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로의 당신의 진출은 세계 제국을 획득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 그리고 지금이 로마인들이 패배를 겪은 때가 행동할 때입니다.grc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필리포스는 이 말에 쉽게 설득되었다.[64]

3. 마케도니아-카르타고 동맹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한니발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협상했다. 기원전 215년 여름, 양측은 동맹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폴리비우스가 전하고 있다. 이 조약에서 그들은 상호 지원과 방어를 맹세하고 서로의 적에게 적대적일 것을 약속했다(단, 현재 동맹국 제외). 구체적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지원하고, 한니발은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을 권리를 갖지만, 어떤 평화 조약에도 필리포스가 포함되어야 하며, 로마는 코르키라, 아폴로니아, 에피다무스, 파로스, 디말레, 파르티니, 아틴타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에게 현재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그의 모든 친구들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명시했다.[14]

폴리비우스가 기록한 조약에는 필리포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한다는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아마도 사잔에서의 실패로 필리포스는 그러한 모험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다.[15] 어쨌든 한니발도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16]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는 길에 필리포스의 사절들은 한니발의 사절들과 함께 로마 함대의 사령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게 포획되었다. 로마 함대는 남부 아풀리아 해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필리포스에게 보낸 편지와 그들의 협정 조건이 발견되었다.[17]

필리포스와 카르타고의 동맹은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로마에 즉각적인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즉시 25척의 군함이 추가로 장비를 갖추어 타렌툼에 있는 플라쿠스의 25척의 군함 함대에 합류하도록 파견되었으며, 이탈리아 아드리아해 해안을 경계하고, 필리포스의 의도를 파악하며, 필요하다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필리포스를 그곳에 묶어두라는 명령을 받았다.[18]

4. 전개 과정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217년에서 기원전 216년 겨울 동안 100척의 군함을 건조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는 "이전까지 마케도니아 왕은 거의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8]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대항할 함대를 유지할 자원이 부족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9] 필리포스 5세는 해상에서 로마와 싸울 의지가 없었는데, 이는 경험과 훈련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필리포스 5세는 일리리아인들이 사용하던 작고 빠른 갤리선인 ''렘비''를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렘비는 한 줄의 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를 젓는 사람 외에 5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10] 필리포스는 렘비를 이용해 한니발에게 집중하고 있을 로마 함대를 피하려 했다. 당시 로마 함대는 서부 시칠리아의 릴리바에움에 주둔하고 있었다.[8]

필리포스 5세는 압수스 강과 게누수스 강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일리리아 국경까지 이르렀다.[11] 그의 계획은 일리리아 해안을 점령하고 해안과 마케도니아 사이 지역을 정복하여 육상 연결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빠르게 증원군을 보내는 것이었다.[12]

기원전 214년 여름, 필리포스 5세와 함대는 마케도니아를 떠나 에우리푸스 해협을 통과한 후 말레아 곶을 돌아 케팔로니아와 레우카스 섬 인근에 정박하여 로마 함대의 위치를 기다렸다. 로마 함대가 여전히 릴리바에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로 북상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함대가 사잔 섬에 접근했을 때, 필리포스는 로마 킨퀘레메스 몇 척이 아폴로니아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필리포스는 로마 함대 전체가 자신을 잡으러 오고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케팔로니아로 돌아갔다. 폴리비우스는 함대의 후퇴를 "공황"과 "혼란"으로 묘사하며, 로마는 단 10척의 함대만 보냈고, "경솔한 경보" 때문에 필리포스 5세가 일리리아에서 목표를 달성할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했다.[13]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 5세는 칸나이 전투 이후의 한니발과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마케도니아는 일리리아를 공격하고, 필요하다면 필리포스가 원군을 보낼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14년 늦여름, 필리포스 5세는 120척의 렘보선을 이끌고 다시 일리리아 침공을 시도하여 오리쿰을 점령하고, 아오스 강(오늘날의 보유사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폴로니아를 포위했다.[19] 기원전 213년에는 육로로 일리리아를 침공하여 리수스와 그 주변을 탈취하고 아드리아 해에 항구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11년, 라에비누스는 자킨토스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아이톨리아 동맹과 함께 아카르나니아의 오이니아다이와 나소스를 공략한 후, 코르키라섬에서 겨울을 보냈다. 필리포스 5세는 북방을 굳히는 작전을 펼쳐 펠라에서 겨울을 보냈다.

기원전 210년에서 209년에 걸친 양군의 움직임(예상도)


필리포스 5세는 파가세스만에서 해안을 따라 공격하여 에키노스를 포위했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는 지원 요청을 받고 구원에 나섰지만 포위를 뚫지 못하고 에키노스는 항복했다. 술피키우스는 아이기나 섬을 점령했고, 아탈로스는 이듬해부터 참전을 결정했다. 아이기나 섬은 아이톨리아 동맹 소유가 된 후 아탈로스에게 매각되었다.

기원전 209년 필리포스 5세는 라미아에서 아이톨리아 군을 격파하고, 일시 휴전을 받아들인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주둔했다. 술피키우스는 카르타고 함대의 움직임을 염려하여 나우팍토스에서 동맹국을 지키는 데 전념했고, 아탈로스가 함대를 이끌고 아이기나 섬에 도착한 것도 6월로 늦어졌다. 엘리스 방어 후 필리포스 5세가 철수하자 로마, 페르가몬 양 함대는 합류하여 아이기나 섬에서 겨울을 났다.

기원전 208년 필리포스 5세 귀국까지의 양군의 움직임(예상도)


기원전 208년 로마-페르가몬 연합 함대는 렘노스 섬, 페파레토스 섬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에우보이아 섬 북부의 오레오스를 함락시켰지만, 칼키스에서 고전하자 맞은편의 오푸스 주변을 점령했다.

필리포스 5세는 동맹국 지원 요청에 로마와 아이톨리아 동맹 회담 장소인 헤라클레이아를 급습하고, 테르모필레를 돌파하여 오푸스에 있던 아탈로스를 격파했다. 아탈로스는 도주했지만, 프루시아스 1세가 페르가몬을 침공하여 귀국해야 했다. 술피키우스도 오레오스를 포기하고 아이기나 섬으로 귀환했다.

필리포스 5세는 코린토스 지협을 넘어 카르타고 함대와 합류하여 안티키라를 탈환했지만,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국했다. 술피키우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듀메를 공격하고 일리리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207년 메갈로폴리스의 필로포이멘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마카니다스를 격파했다.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을 집중 공격하여 단독 강화 조약을 맺고, 로마와 교섭했다.

4. 1. 로마의 대응

로마는 필리포스 5세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함대를 타렌툼에서 브룬디시움으로 이동시키고, 군단을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이 모든 지휘는 프로프라이토르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에비누스가 맡았다.[20] 라에비누스는 일리리아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고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건너가 오리쿰을 거의 전투 없이 탈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21] 라에비누스는 아폴로니아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퀸투스 네비우스 크리스타의 지휘 아래 2,000명의 병력을 강 어귀로 보냈다. 크리스타는 필리포스 군대를 피해 밤에 몰래 도시에 들어갔다. 다음 날 밤, 필리포스 군대를 기습하여 진영을 격파했다. 필리포스는 강에 있는 배로 도망쳐 산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돌아갔고, 함대를 불태우고 수천 명의 병사를 잃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군대의 모든 소지품을 남겨두었다. 라에비누스와 함대는 오리쿰에서 겨울을 보냈다.

해상으로 일리리아 침공이 두 번 좌절되고, 라에비누스 함대에 의해 아드리아 해에 갇힌 필리포스 5세는 이후 2년(기원전 213-212년) 동안 육로로 일리리아에서 진격을 거듭했다. 해안을 피해 다사레티, 아틴타니, 파르티니와 디말레 마을을 점령했다.[22]

4. 2. 그리스 동맹국들과의 협력

로마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동맹을 맺어 마케도니아에 대항했다.[25] 기원전 211년 조약에 따라 아이톨리아는 육상, 로마는 해상 작전을 맡고, 노예와 전리품은 로마가, 영토는 아이톨리아가 관리하기로 했다.[26] 엘리스, 스파르타, 메세니아, 페르가몬아탈로스 1세도 동맹에 참여했다.[26]

로마 함대는 페르가몬 함대와 함께 에게 해를 장악하여 마케도니아의 해상 활동을 견제했다.[31]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의 지휘 아래, 로마는 아이기나 섬을 점령하여 아탈로스에게 판매했고, 아탈로스는 이 섬을 에게 해에서의 작전 기지로 활용했다.

로마와 그리스 동맹국 협력 요약
국가/세력역할주요 활동 및 사건
로마 공화정해상 작전 주도, 전리품 획득자킨토스 점령,[27] 안티키라 점령 (주민 노예화),[29] 아이기나 섬 점령 및 아탈로스에게 매각
아이톨리아 동맹육상 작전 주도, 영토 관리아카르나니아 침공 시도,[28] 안티키라 점령,[29] 라미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5세에게 패배[34]
페르가몬해상 작전 지원, 에게 해 거점 확보아이기나 섬 구매 및 작전 기지로 활용, 로마 함대와 협력
스파르타, 엘리스, 메세니아동맹 참여초반에는 소극적 태도[33], 이후 만티네이아 전투 등 참전


4. 3. 필리포스 5세의 전략 변화

해상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필리포스 5세는 전략을 바꾸어 육로로 일리리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사레티, 아틴타니, 파르티니와 디말레 마을을 점령했다.[22]

필리포스 5세는 마침내 리수스와 그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하여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 후 주변 지역이 항복했다.[23] 리수스 점령은 필리포스 5세에게 이탈리아 침공에 대한 희망을 다시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보이지만,[24] 함대 손실로 인해 카르타고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침공의 전망은 덜 매력적이게 되었다.

5. 평화 협상과 종전

기원전 213년, 필리포스 5세는 육로로 일리리아를 침공하여 스케르딜라이다스로부터 리수스와 그 주변을 탈취하고 아드리아해에 항구를 확보했다. 로마아이톨리아 동맹과의 제휴를 모색했고, 기원전 211년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동맹 도시 전쟁의 실지 회복과 아카르나니아 지방 획득을 기대하며 로마와 동맹했다.

기원전 211년, 로마는 자킨토스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아이톨리아 동맹과 공동으로 오이니아다이와 나소스를 공략했다. 기원전 206년,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의 동의 없이 필리포스 5세와 단독 강화했다.[49] 리비우스는 로마가 아이톨리아를 버렸기 때문에 강화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49]

이듬해 봄, 로마는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를 일리리아의 디라키움으로 보냈지만, 필리포스 5세가 도착하자 아폴로니아로 철수했다.[50] 기원전 205년, 페니케에서 "페니케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50] 로마는 아틴타네스족을, 필리포스 5세는 리수스를 포기하기로 결정되었고, 로마 민회에서 조약이 승인되었다.

5. 1. 평화 협상의 시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기원전 209년, 필리포스 5세라미아에서 두 차례 승리한 후, 팔라라에서 이집트, 로도스, 아테네, 키오스 등 중립국 대표들과 만나 평화를 논의했다.[35] 이들은 무역에 지장을 주는 전쟁을 끝내려 했다.[35] 리비우스는 이들이 "다른 그리스인들보다 호전적인 아이톨리아 동맹보다는, 필리포스와 그의 왕국이 그리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경우 심각하게 위협받을 그리스의 자유"를 우려했다고 전한다.[35] 아타마니아의 아미난드로스가 아이톨리아 동맹을 대표하여 회담에 참석했고, 30일간의 휴전과 아카이아에서의 평화 회담이 결정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이동하여 아탈루스의 상륙을 저지하려 했고, 이후 아이기움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탈루스가 아이기나에 도착하고 로마 함대가 나우팍토스에 있다는 소식에 회담은 중단되었다. 이에 고무된 아이톨리아 대표들은 필리포스 5세에게 필로스를 메세니아인에게, 아틴타니아를 로마에게, 아르디아이를 스케르딜라이다스와 플라우라투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격분한" 필리포스 5세는 협상을 중단했다.[36]

기원전 208년, 헤라클레아 트라키니아에서 열린 아이톨리아 의회에 이집트와 로도스 대표들이 참석하여 평화를 중재하려 했으나, 필리포스 5세는 회의를 방해하려다 늦게 도착했다.[41]

5. 2. 아이톨리아 동맹의 이탈과 포이니케 조약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5년)

기원전 207년, 전쟁은 필리포스 5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페르가몬로마에게 버림받은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의 조건으로 평화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전투 후, 기원전 206년에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의 동의 없이 필리포스 5세가 부과한 조건으로 별도의 평화를 모색했다.[49]

기원전 206년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로마는 원군을 보내 아이톨리아 동맹과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고도 하지만, 리비우스의 기술이나 그 후의 전개 등으로 부터 이 작전의 존재는 의문시 되고 있다.[49] 결국,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가 아에톨리아를 버렸기 때문에, 아에톨리아 동맹은 마케도니아와 단독 강화했다.[49] 평화 조약 체결 당시 아이톨리아 동맹은 배상금이나 영토를 요구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어디까지나 그리스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형식을 지킴으로써 마케도니아 역시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49]

이듬해 봄, 로마인들은 감찰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를 전함 35척과 병력 11,000명을 이끌고 일리리아의 디라키움으로 보냈지만, 필리포스 5세가 도착하자 셈프로니우스는 포위를 풀고 아폴로니아 성벽 안으로 철수했다. 셈프로니우스는 아이톨리아인들이 필리포스 5세와의 평화를 깨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50]

그리스에 더 이상 동맹국이 없었지만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을 지원하는 것을 막는다는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평화를 맺을 준비가 되었다. 기원전 205년에 페니케에서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른바 "페니케 평화"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50]

강화 조약 협상에는 로도스 섬 등 이전까지의 중재 역할은 관여하지 않았고, 에페이로스와 접한 아타마니아의 아미난데르가 입회한 것으로 보이며, 필리포스 5세와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와의 결전이 임박했던 로마는 일리리아 정복지에 관하여 타협했을 것이다. 로마는 아틴타네스 족을, 필리포스 5세는 리수스를 포기하기로 결정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국가가 증인이 되었고, 로마 측도 민회에서 전체 트리부스(선거구)가 찬성하여 성립되었다.

6. 전쟁의 결과와 영향

평화 조약 체결 당시 아이톨리아 동맹은 배상금이나 영토를 요구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리스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명분을 지켜 마케도니아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1] 나우팍토스와 마찬가지로 현상 유지를 확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2]

이 기간 동안 로마는 침묵했지만,[3] 아이톨리아가 이탈하면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홀로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4]

기원전 205년,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담당 프로콘술로 파견되었다.[5] 일부 학자들은 셈프로니우스와의 교체가 기원전 206년에 이루어졌으며, 아피아노스가 언급한 로마의 원군이 그를 가리킨다고 추정한다.[6] 셈프로니우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새로운 전력을 과시하며 전투를 설득했지만 거절당했고, 필리포스 5세가 아폴로니아 방면으로 침공하자 방어에 나섰다. 필리포스 5세 역시 전쟁 장기화와 아이톨리아 동맹의 배신을 경계했고, 에페이로스가 양측의 피해를 호소하며 중재를 요청하자 양국은 포이니케에서 회담을 갖고 에페이로스 주민을 위한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강화 조약에 합의했다.[7]

이 강화 조약 협상에는 로도스 섬 등 이전의 중재자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에페이로스와 인접한 아타마니아의 아미난데르가 입회한 것으로 보인다. 필리포스 5세와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와의 결전을 앞둔 로마는 일리리아 정복지에 대해 타협했을 것이다.[8] 로마는 아틴타네스 족을, 필리포스 5세는 리수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며, 많은 국가들이 증인으로 참여했고 로마 측도 민회에서 전체 트리부스(선거구)가 찬성하여 조약이 성립되었다.[9] 로마 시민들은 전쟁 종결을 기뻐했지만,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양국 모두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10] 일리리아 왕은 스켈딜라이다스에서 플라우라투스로 계승되었지만, 마케도니아로부터 영토 반환이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11]

마케도니아와 아이톨리아 동맹의 단독 강화를 추진하고 때로는 로마를 비난했던 로도스 섬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은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원로원에 잇따라 나타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필리포스 5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상대로 맺은 비밀 협정(실제 존재 여부는 논란이 있음)을 이유로 로마의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 민중은 반대했지만 술피키우스의 연설로 인해 결국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12]

포이니케 조약은 로마의 의도대로 체결되었지만, 그 직전 새로운 전력을 투입하여 로마가 가장 곤경에 처했을 때 공격한 필리포스 5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굴욕적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원로원은 재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13] 포이니케 조약에서 그리스 여러 나라의 외교 술수에 당했다고 볼 수 있는 로마는 이를 통해 교훈을 얻었고,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라에비누스, 술피키우스, 투디타누스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며 마케도니아의 위협으로부터 그리스 여러 나라를 지키는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필리포스 5세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로마 외교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14] 로마가 일리리아라는 완충국을 사이에 두고 다른 강대국과 공존하려 한 최초의 사례이며,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어쩔 수 없이 정복해 나간 결과,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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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3.16, 3.18–19, 4.66 https://www.perseus.[...]
[3] 웹사이트 5.101 https://www.perseus.[...]
[4] 웹사이트 5.102 https://www.perseus.[...]
[5] 웹사이트 5.103–-105 https://www.perseus.[...]
[6] 웹사이트 5.103 https://www.perseus.[...]
[7] 웹사이트 5.104 https://www.perseus.[...]
[8] 웹사이트 5.109 https://www.perseus.[...]
[9] 웹사이트 5.1, 5.95, 5.108 https://www.perseus.[...]
[10] 웹사이트 2.3 https://www.perseus.[...]
[11] 웹사이트 5.108 https://www.perseus.[...]
[12] 문서 Walbank, p. 69
[13] 웹사이트 5.110 https://www.perseus.[...]
[14] 웹사이트 7.9 https://www.perseus.[...]
[15] 문서 According to Walbank, p. 71, note 1, the version of the treaty described in Livy, 23.33.9–12 which mention an Italian invasion by Philip, "are worthless annalistic fabrications".
[16] 문서 Walbank, p. 69, note 3
[17] 웹사이트 23.34 https://la.wikisourc[...]
[18] 웹사이트 23.38 https://la.wikisourc[...]
[19] 웹사이트 24.40 https://la.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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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24.40 https://la.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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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8.15 8.15–16 https://www.pers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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